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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밖에 나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무더운 여름.
    비라도 주륵주륵 내려주면 좋겠지만 비가 매일 오는 건 아니기 때문에, 우천 시가 아닐 때는 햇볕이 내뿜은 강렬한 열기를 그대로 맞아야 합니다.

    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것을 시도합니다.

    인파에 쓸려 사서 고생을 할지언정 바다나 계곡에 놀러가 물놀이를 하고, 이도저도 귀찮으면 방에 박혀 전기세를 각오하고 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바람을 맞습니다.

    또 과즙이 가득한 수박, 시원한 참외, 생각만 해도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땡볕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속을 달래기도 하죠.

    이 일련의 행위들을 피서’(더위를 피하다)라고 부르며, 그와 함께 또 하나의 명칭이 있으니 바로 납량.


    여름만 되면 등장하는 납량특집, 이라는 합성어가 대중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납량, 하면 뭔가 무섭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실제로 납량은 '들일 납'자와 '시원할 량'을 써서 시원함을 들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 등골이 서늘하거나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현을 쓰죠.

    확실히 시원함을 소환하는 수단으로 '공포 드라마'나 '공포 영화'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납량특집' 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KBS의 유서 깊은 공포 드라마 시리즈, '전설의 고향'입니다.

    지역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 그리고 설화가 있는데, 전설의 고향은 그 민담을 베이스로 한 드라마예요.

    아무래도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야기였던만큼 흐름이 단순하고 무엇보다 권선징악의 결말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죠.

    뿐만 아니라 역사서에 있는 이야기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원래 있었던, 아니 있었다는 이야기에 적절한 각색을 더하는 것.

    한 편에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 이야기는 어디어디에서 내려오는 전설로, 이런이런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등의 내레이션이 깔립니다.

    아무래도 한참 전에 방영되어 꽤 오래 그 역사를 이어간 작품이다보니,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요즘과 비교해보면 특수효과나 분장 등이 다소 조악하긴 해요.

    딱 봐도 가짜라는 걸 알겠는데 당시에는 그게 왜 그리 무서웠던지.


    덕분에 어릴 때는 늦은 밤에 이 드라마를 볼 때, 벽에 등을 딱 붙이고 동생과 바싹 붙어 앉아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본 기억이 있어요.

    이상하게 둘 다 무서움을 많이 타면서도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면 궁금해하며 보는 경향이 있다는 말씀.

    결국 끝까지 다 봐놓고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 되면 동생이랑 의기투합해 함께 일부러 웃긴 이야기를 해가며 나란히 잠들거나, 그게 안 되면 부모님 방에 슬금슬금 들어가 바닥에 새우처럼 누워서 잠든 적도 있는데요.

    다음 날 아침,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저를 본 어머니는 황당해하며 그러니까 꿈자리 사납게 그런 걸 왜 보냐!’라고 일갈하시곤 했습니다.

    제가 잠을 설칠 정도로 겁을 먹으면서도 이 작품을 봤던 건,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단다, 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듯한 스토리텔링이 좋았기 때문이에요.

    시간이 지나며 드라마의 영상미나 스토리텔링은 세련미를 더해가고 있지만 투박하고 직설적인 옛 이야기도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런 민담은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침을 주거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요즘 들으면 소위 '옛스러운 가치관'이 튀어나오기 일쑤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라 이런 구전설화를 듣는 건 꽤 흥미진진합니다.

    가정환경상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레 들을 일이 없다보니 책 내지는 드라마로 접할 수밖에 없었구요.


    그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름만 되면 전설의 고향 안 하나?’라는 이야기가 한 번씩 나오곤 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해 등장한 게 2008년과 2009년에 돌아온 전설의 고향’.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나온 작품이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설의 고향이라기보단 공포물에 흔히 나올 법한 소재를 이용해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아예 코미디 장르까지 들어가 있었을 정도니까.

    그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작품은, ‘인종에게 문정왕후가 독이 든 떡을 건네서 독살했다라는 야사를 채택해 각색한 귀서였습니다.

    초반부터 기이하게 사람이 죽어나가며 공포심을 자극하고, 중후반으로 넘어가며 인종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때까지는 마치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완성도를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다소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 야사를 꽤 정성스레 다뤘다는 느낌이라 아직까지도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예요.

    인종의 처연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더 애정이 갑니다.

    물론 전설의 고향 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게 구미호, 저승사자, 내 다리 내놔! 긴 하지만……

    저 셋은 워낙 유명하니까 제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밤중에 자리에 누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옛날옛날에, 를 듣는 듯.

    혹은 밤중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친구들과 함께 촛불 하나 켜놓고 이야기를 듣는 듯.

    전설의 고향이 가진 매력은 이런 데서 오는 것 같아요.

    기막힌 트릭, 개연성 등보다는 예로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졌기에 사람들’의 내적인 바람과 의식이 짙게 배어 있고, 또 대체로 권선징악 혹은 어쨌든 해피엔딩- 이라는 결론을 단순하게 내기 때문에 뭘 따져가며 볼 필요가 없죠.

    내가 겪은 일인데, 다른 동네 아무개씨가 겪은 일이라는데- 라는 데서 오는 '실화 기반의 생생한 공포체험'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귀를 쫑긋하게 하는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진짜 있었던 일'은 흥미를 돋우니까요.

    그래서인지 전설의 고향 제작이 중지된 지금도, 이 옛 괴담이 다시 등장한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동생과 함께 이불 뒤집어쓰고 엄마야소리를 연달아 내뱉으며 봤던 이 드라마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