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연재게시판)

    2월의 데킬라

    완벽한 타인과 술이 만났을 때



    취하면 종종 아무것도 모른다는 해사한 얼굴로 엉뚱한 짓을 일삼아서 그런지 혹자는 나와 술 먹는 게 재밌다고 했다. 그날을 곱씹어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고.


    혹자는 버겁다 했다. 과하게 업된 텐션을 감당하기가 힘에 부친다고. 위험해 보인다고도 했다. 술에 절여져 걱정이라곤 티끌도 없는 것 마냥 구는 게 우울을 한아름 담고 사는 것 같다고. 그럴 때마다 항변했다. 그냥 좋아서, 정말 단순하게 마음이 맞는 사람과 술을 기울이는 행위 자체가 좋아서 술을 마시게 될 뿐이라고.


    열사처럼 목소리를 높여가며 항변하는 와중에 취한 내가 버겁다는 말이 모여 무거운 마음 하나가 빚어졌다. 정신을 반쯤 잃은 채로 조잘댔던 깊은 이야기들, 텐션이 과하게 업된 상태로 저질렀던 행동들이 한 점에서 만나 ‘내'가 만들어지는 그 찰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사람을 사랑하고 술을 즐기는 천성을 저버리고서 술자리를 피하기로 한 건 아니다. 완벽한 타인과 마시는 술자리가 나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3년 전이었나. 벨기에의 작은 도시 루벤(leuven)에 머무는 친구를 찾았던 때가 생각난다. 석사 생활을 하던 그녀는 시험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한국말'을 하고 싶다며 나의 방문을 격하게 반겼다. 실제로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험의 늪에 빠진 친구보다 오히려 친구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다. 방문 3일차, 그 날은 멕시코 출신 어메리칸 친구(앞으로 친친이라 표현하겠다)와 함께 시내의 작은 클럽으로 향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데킬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한 타임 즐기다 잔잔한 음악으로 바뀌면 바(bar)에 걸터 서서 경쾌한 건배사를 외치며 데킬라 한 잔 씩 목줄기로 내려 보냈다. 몇 번의 사이클을 돌았을까. 어느새 알딸딸해진 우리는 잠깐 쉬자며 클럽 맞은편의 맥도날드에 걸터 앉았다.





    2월의 데킬라는 생각보다 따뜻하다. 추운 날씨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몸의 온도를 따스한 공기로 감싸기도 하지만 완벽한 타인에게 날카롭게 곧추선 경계심을 녹이기도 한다. 서로에게 머나먼 땅인 벨기에에서 처음 본 우리는 벨기에에 오게 된 계기부터 기웃대며 각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서서히 가족 얘기로 넘어가며 술자리 진지토크가 개시됐던 듯 싶다. 친친의 아버지 이야기, 나의 아버지 이야기.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상처 받은 사건들. 의지했던 사람에게서 받은 모진 말들. 24시간을 욕해도 모자랄 전 남자친구 이야기. 돈이 없어 서러웠던 순간들. 취하지 않고서야 꺼내 놓기 힘든 이야기들.


    어쩌다 그렇게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됐는지 세세한 기억은 없다. 과정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솔직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던 것 같다. 아마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친친이어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분석할지 전혀 걱정되지 않아서.


    친친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기숙사로 복귀하며 잃은 건 없고, 얻을 건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겠다 싶었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완벽한 타인과 나눈 이야기는 언제든지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다 얘기가 잘 통한다면 원거리 우정을 남길지도 모른다.


    세상 정말 좁디 좁다고, 언젠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What a small world!"라며 감탄사를 내뱉을 순간이 온다면 데킬라 한잔을 청해야겠다.